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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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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21-06-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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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천대

 

 

첫 번째 기초과학 측정용 천문의기 영역 중에서 중심에 있는 관천대는 세종 시대 천문연구의 상징성이 있는 천문대다. 사실 관천대는 세종 이전인 태종 시기에 이미 설치를 시도했다. 태종실록에서 그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관천대(觀天臺)를 쌓으라고 명했다. 예조(禮曹)에서 서운관(書雲觀)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예전에 천자(天子)는 영대(靈臺)가 있어 천지를 측후(測候)했고, 제후(諸侯)는 시대(時臺)가 있어 사시(四時)를 측후하고 요사한 기운을 관측했으니, 마땅히 예전 제도에 따라 대()를 쌓아 천문(天文)을 측후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으나, 마침내 시행하지 아니했다.

 

위의 태종실록에 보듯이 세종 즉위 1년 전인 1417년 태종은 예조에서 관천대를 쌓으라고 요구하자 그대로 따랐지만, 어쩐 일인지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세종실록에는 첨성대라는 용어는 기록    에 보이지 않지만, ‘간의대(簡儀臺)’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어 있다. 한편 연려실기술별집 제15권 천문 전고(典故)의 첨성에는 세종 2년 경자년 3월에 임금이 내관상감을 설치하여 첨성대를 세우기를 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1437년 세종 19415일자 세종실록기록에 간의와 간의대 제작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간의대라는 천문대는 1432년 건축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세종실록을 종합해보면 1420첨성대라는 천문대가 있었고, 12년 뒤인 1432년 오늘날 천체망원경인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호조 판서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後苑) 경회루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높이는 31척이고, 길이는 47, 넓이는 32척인데, 돌로 난간을 두르고 간의를 엎드려 놓았다.

 

이때 건립된 간의대의 규모는 주척(20.7기준)으로 했을 때 길이 9.73m, 가로 6.62m, 높이는 대략 6.42m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의 관천대는 숙종 14(1688)에 세운 창경궁 소재의 것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다. 세종대에는 간의대 위에 간의가 올려져 있었으나 현재 이곳에는 적도의가 올려져 있다

 

이후 간의대는 14338월 혼천의가 만들어지자 임금과 세자가 매일 간의대에 이르러서 정초 등과 그 제도를 의논했다고 했다. 이 간의대는 143834일 이후는 서운관에서 주장하여 밤마다 다섯 사람이 관측을 맡아보게 했다. 14421226일 별궁을 짓는다는 이유로 간의대를 북쪽으로 옮기게 했고, 144313일에는 간의대 옛터에 궁을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114일자 실록에는 윤사윤이 간의대를 헐고 후궁을 세우려고 하는 것에 그 완급은 알 수 없지만 정지해달라고 청하는 기사가 있어 아직 그때까지 헐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이에 세종이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간의대 앞 남쪽에는 정방안(正方案)을 두었고 대의 서쪽에는 동표를 세웠는데 높이는 5배이고 8척의 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해석은 다소 어색한데, 이때 세운 동표가 기존의 것 8척의 5배였다는 의미가 맞을 듯하다.

 

1443년 실록에 기록된 세종의 말 중에서 중국 사신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라는 구절은 당시 천문연구가 외교 문제와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즉 천문은 황제의 영역이었는데, 명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에서 천문을 연구하고 또 성과물들을 이룩한 것이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종의 천문연구와 업적은 당시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할 때 자주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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