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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의 대가(大家)인 세종은 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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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21-06-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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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의 대가(大家)인 세종은 천문학자

 

 

      위로는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민사(民事)에 부지런하시니 우리 전하께서 물건을 만들어 일에 힘쓰게 하는 지극한 어지심과, 농사에 힘쓰고 근본을 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거룩한 일이니, 장차 높은 대와 더불어 무궁토록 함께 전할 것이다.

 

      예전에 영릉을 찾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다시 영릉을 찾는다면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일단 주차장이 영릉에서 동쪽으로 상당히 물러나 있고, 주차장 옆에는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역사문화관은 제1실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2실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 그리고 세계유산 조선왕릉 등 3개의 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을 통해 역사 속에서 그의 위치에 접근하는 것으로부터 영릉 답사를 시작하기 바란다. 역사문화관을 나서서 영릉의 천문의기들을 새롭게 이전 배치한 야외 전시장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대왕 세종의 영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역사문화관에서 서쪽으로 진행하여 천문의기 배치공간을 통과하도록 동선이 기획되어 있다.

 

앞에서 세종실록기록을 인용했는데 짧은 글 속에 이곳에 조성해놓은 천문의기들의 탄생 이면에 들어 있는 세종의 철학과 실학정신, 그리고 백성을 향한 애민의 따뜻함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위로는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민사(民事)에 부지런했다는 의미는 임금이 가져야 할 여러 덕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상수시(觀象授時)를 통한 백성 돌봄이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런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실천하기 위해 겉치레뿐인 말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실천했다. 경세치용을 위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통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행한 것이다. 그것이 물건을 만들어 일에 힘쓰게 하는 지극한 어지심이라는 표현에 들어 있다. 사농공상의 위계적 관념의 차별적 접근을 당연시하던 사회에서 세종은 그러한 관습과 고착화된 사고를 깨고 뛰어넘었다. 세종은 농사에 힘쓰고 근본을 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을 이루기 위해 조선의 하늘에 맞는 시계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곳 천문의기 야외 전시 공간은 총 네 곳으로 영역화하여 분산 배치했는데, 천문의기의 기능별 영역과 제작 시기 그리고 사서 기록 속의 배치구조 등을 고려했다. 천문에서 세종의 향기를 쫓아가다 보면 당대에 천문학의 발전은 세종 자신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즉위 초기에 첨성대를 지으라 명하고 전문가를 불러들여 혼천의에 대해 논하며, 첨성대를 찾아와 노인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또 그 노인성을 관측하려고 5년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또한 뒤이어 만나게 될 천문과학의 시작인 간의 제작을 명하면서 그 핵심이 서울의 북극고도를 측정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세종 자신이 천문학자였다. 다음 글에서 세종을 천문학자라고 보아도 과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왕(帝王)의 정치에 있어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여 정확한 때를 알려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 동국(東國)의 일관(日官)은 역술에 서투른 지가 오래되었다. 선덕[宣德: ()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계축년(1433, 세종 15) 가을에 우리 전하[殿下: 세종(世宗)]께서는 신충(宸衷: 임금의 마음이나 고충)에서 우러나시어 의상(儀象)과 귀루(晷漏)에 관한 의기(儀器)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관한 문헌을 두루 살피고 연구하셨고, 모두에 아주 정통하셨다.

 

이순지가 편찬한 제가역상집의 발문에 나와 있는 대로 세종은 의기와 천문 그리고 역법에 관한 문헌을 연구했고, 모두에 아주 정통했다. 실례로 주야 시간 측정기인 일성정시의 제작을 명하고 다 만들어진 뒤에는 세종이 직접 일성정시의를 통해 시간을 측정하는 법을 지었는데, 김돈이 명()을 지으면서 남긴 다음 글을 보면 세종이 천문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임금이 시각을 정하는 제도를 서술한 글이 간이(簡易)하고 상세하여 손바닥을 가리킴과 같이 명백하기 때문에 돈 등이 능히 한 글자도 바꾸지 못하고 그 글의 머리와 끝만 보태어 그대로 명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왕 중에서 특정 전문영역인 천문에 대해 세종만큼 정통했던 군주가 또 있었을까. 세종은 자신이 천문을 연구하여 통달하면 전문가를 불러 그것에 대해 논했고, 그런 다음 제작을 명했다. 왜 그랬을까. 그 속에 세종의 철학이 있었고, 그 끝에 백성이 있었다. 백성을 향한 세종의 애민은 천문영역의 연구와 개발 과정에서 명나라와 외교 문제도 뛰어넘는 자주조선을 가능하게 했다. 이제 대왕 세종의 향기를 천문의기 속에서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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