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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에 대한 세종의 집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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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26회 작성일 21-06-22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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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나라 역사상 천문과학유산을 가장 많이 남긴 시기는 세종 때였다. 그 이전과 이후에는 왜 이 같은 천문과학기기들이 많지 않았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이미 단군조선 시기부터 천문을 관측하고 그 결과를 사서에 남겨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기원전 173313세 흘달 단군 때의 오성취루 기록이다(戊辰五十年 五星聚婁黃鶴來棲苑松). 이는 토성·목성·화성·금성·수성 등 5개의 행성이 루수(婁宿)’라는 별자리에 모였다는 의미다. 5개의 행성이 모이는 이른바 오위합취(五緯合聚)’는 고구려 차대왕 때도 있었는데, 이때 기록은 증보문헌비고에서 엿볼 수 있다. “차대왕 4(149) 여름 5월에 오성이 동방에 모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천문관리를 두고 일식을 관측했고, 낮에도 금성을 관측하여 태백주현(太白晝見)’이라는 기록을 남겨놓기까지 했다. 삼국시대 태백주현은 신라 4, 고구려 1, 백제 3회 등 총 8회의 관측기록을 남겼다. 이렇듯 단군조선으로부터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및 조선으로 이어지는 천문관측 역사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특히 조선 시대 세종 때는 간의, 혼천의, 자격루, 앙부일구, 천평일구, 일성정시의 등 셀 수 없이 많은 과학기기를 제작했는데, 그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세종이라는 임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세종의 리더십이 그 배경이다. 조선만의 시계와 역법을 만들고자 한 세종의 철학,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학자, 천문학자, 기술자 등 수많은 전문가를 양성했고 심지어 해외 파견까지 보내 전문성을 심화시키게 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실력과 능력을 갖춘 자라면 등용했다. 1425년 천문학자들에게 남극노인성을 관측하라는 임무를 내린 뒤 세종은 약 5년간 포기하지 않고 천문학자를 백두산, 설한점, 한라산 등지로 계속 파견하여 1430년 끝내 관측을 성공시킨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목표 달성을 위한 인내와 신뢰는 무엇보다 세종 시대의 과학, 특히 천문의기 제작의 전성기를 가져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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