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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와 소간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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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3회 작성일 22-02-1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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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와 소간의

 

      간의가 태어나는 배경에는 세종의 뜻이 함께했다. 14327월 임금이 경연에서 역상(曆象)의 이치를 논하다가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간의를 만들어 올리라는 주문을 하게 된다. 세종은 이날 경연에서 정인지에게 정초와 더불어 고전을 강구하고 의표(儀表)를 참작해서 측험하는 일을 갖추게 하라고 했고, “핵심은 북극이 땅 위에 나온 높낮이를 정하는 데 있으니 간의를 만들라라고 했다. 이에 정초와 정인지가 옛 제도를 상고하는 일을 맡고, 이천은 공역을 감독하는 일을 맡아서 먼저 나무로 모양을 만들고 북극이 땅에서 38도가 나온 것을 정했다. 원사의 측정값과 조금 합하므로 구리로 간의를 만들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중 한양의 북극고도에 관한 내용은 先製木樣(선제목양), 以定北極出地三十八度(이정북극출지삼십팔도), 少與(소여) 元史(원사)所測合符(소측합부), 遂鑄銅爲儀(수주동위의)”라는 기록을 해석한 것인데,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38’, 전상운의 한국과학사에는 ‘38도 소(), 381/4’, 조지프 니덤의 조선의 서운관에서는 ‘38.25’, 서호수의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서는 “38도 소() 남짓이라고 하고 주석에서 1/4을 말한다라고 부연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연구자의 해석을 종합할 때 세종 시기 한양의 북극고도는 38.25도였다.

 

세종 시대 천문과학의 빛나는 업적의 출발은 세종이 경연에서 간의를 만들라고 명을 내린 뒤부터이고, 그 첫 사업이 수도 서울에서 북극의 고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천문연구를 하려면 천체관측 기기들이 필요한데 그 기기의 핵심은 천구의 중심축인 북극의 위치를 알아내어 그 축에 기기들을 일치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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